당그니의 일본표류기


1.

 지난주 토요일은 채현이가 다니는 보육원 운동회가 있던 날이었다.


 이미 2주전부터 처한테 미리 시간을 비워두라고 이야기를 들었지만, 나는 웬일인지 거기에 가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조금 귀찮기도 했고, 사소한 것 하나까지 일일히 다 챙기는 일본의 보육원 문화가 내 스타일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로 원에서 때되면 보내오는 식단표 하며, 스케줄표 하며, 일기장, 또 여기서 마련해 가야하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은 맞벌이 부부인 우리에게 매우 피곤한 일이다.








일본아해들(2-3세)이 좋아하는 캐릭터 1위로 당당히 뽑힌 앙팡맨(찐빵맨) 캐릭터, 보육원에 미끄럼틀로 있습니다. 그 위에 걸려있는게 자칭 김채현 화백의 추상화 입니다. (근데, 2-3세의 인기투표를 어떻게 했을까요. 세계 10 대 영유아 불가사의라는..)


  게다가 황금같은 휴일인 토요일에 '운동회'라니. 게다가 나는 지금 일본의 전국시대를 연구중이지 않는가?(누가 그런거 하라 그랬남) 좀 아침에 늘어지게 자고 읽어야할 자료도 많고 세상이 내게 원하는 일은 별로 없지만, 내가 혼자서 해야한다고 설치는 일은 많다. ㅜ.ㅜ 그런 마당에 운동회라니... ㅜ.ㅜ


  어쨋거나 아침에 늦게 일어난 죄로 채현이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갔다. 그것은 아빠로서 아주 최소한의 성의고, 처 혼자 보내고 집에서 잠을 퍼자는 것도 영 찜찜한 일이었기에....물론 마님은 나중에 천천히 걸어오셨다(?).




2.


 보육원에 도착하니, 이미 담앞에는 아이들이 만들어놓은 각종 공작물 및 전시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일본의 보육원은 보통 1살미만부터 4살까지 아이들이 다니는 곳으로, 한국의 '어린이집'이라고 보면 되겠다. 일본의 보육원은 어떻게 보면 일본사회의 현미경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본의 아이들은 거기서 조직과 집단성을 배우고, 아직 국가가 어른들의 추악한 역사와 정치를 개입시킬 여지가 없는 시기에, 보육원 보모들이 어떤식으로 아이들에게 세상과 만나게 해주는가를 엿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장치이기도 하니까.


 어쨌거나, 이 수많은 게시물을 만들기 위해서 또 얼마나 많은 선생들이 노력을 했을까 떠올려보면, 겨우 동화책이나 좀 읽어주는 나로서는 스스로가 조금 한심해진다. ㅎㅎㅎ. 게다가 이렇게 인터넷만 하고 있으니, 진짜 나쁜 아빠이기도 하지. (채현아 미안타. 다 이게 우유값 벌기 위해서란다 ㅜ.ㅜ 라고 자위는 해보지만 어찌 영 진심이 아닌거 같아서....)









 보육원 내의 조그만 미니 운동장에는 이미 엄마,아빠들 뿐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구석구석 자리를 잡고, 올림픽 취재하는 사진기자들 처럼 다들 삼각대까지 가지고 와서 촬영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일본의 무비카메라 광고는 기본적으로 자녀들의 운동회 촬영을 CF로 삼는 경우가 많다. 당장 나같은 경우도 디지탈 카메라에 내장되어 있는 동영상으로 대충 때웠으나, 딸래미가 더 크고 내년 운동회때는 안 산다는 보장을 못한다. 그 '쇼'하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뙤약볕 밑에서 줄을 맞추고 행진을 해야했는지 3-4살 된 아이들이 추는 조직적인 춤을 보면서 알 수 있었다.




3.


어쨋거나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보여줄 쇼를 위해서 그 더운 햇볕 아래서 재롱을 떨어야 했는데, 2-4살까지 애들은 그나마 말귀를 알아먹고, 어느정도 참을성이 있어서 괜찮았는데, 문제는 채현이가 속해있는 1살짜리 얼라들 반이었다. 이름하여 쯔쿠시 구미(구미는 반을 뜻함). 아직 말을 잘 못하는 얼라들이 태반인데, 그 모습을 보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 끝까지 울음을 멈추지 않는 아이의 체력도 빛난 자리. 다른 아이들은 사탕을 입에 넣고 더위를 참는 중. 빨간옷이 딸래미.

운동회 시작부터 끝까지 우는 아이(정말 체력도 대단하다 ㅜ.ㅜ)도 있었고 댄스음악이 흘러도 소 닭보듯 하는 아이들 등등 각양각색. 그런 아이들을 데리고 정해진 프로그램 끝까지 - 이를테면 부모와 함께 하는 댄스, 게임 등등- 해내게 하는 선생들의 인내력도 대단했다.  


 그 와중에 신기한게 한가지 있었다면,  아이들이 아무리 울고 불어도, 부모의 품으로 오려고 해도,일본의 부모들은 절대 가까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일단은 무조건 선생들의 지시에 맡겨두는 편이었다. 물론 선생들은 모여있는 집단에서 떠나려는 아이들은 가차없이 연행(?)해서 제자리에 앉혀두곤 했다.




 그럼 우리의 채현양은 어땠는가. 채현양은 무덤덤하게 표정의 변화도 없이, 우리가 아는체해도 본체 만체 했다. 우리 부모 맞아??...이 정도로. 그리고 춤을 신나게 잘 추어서 '츠쿠시 반'에서는 유일하게 무대위로 올라가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의지의 미니 한국인이었다.








노란 모자가 채현이로 1살짜리 애들 반이다. 빨간,녹색이 두-세살 반.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나이로 보인다 -_-;;
사실 다 이게 내가 집에서 깨물고, 물어뜯고, 씨름을 해서 훈련을 시킨 결과다(음하하). 그래서 채현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나다 ㅜ.ㅜ. 왜냐하면 나 빼고 그렇게 괴롭히는 사람이 없을 뿐더러 따라서 울일도 없다는 사실. (현재는 유화정책중)




4.


 운동회는 아이들의 이어달리기, 공 집어넣기, 어른들의 줄다리기 등 2시간 반의 강행군(?)으로 끝이 났다. 나는 어른들의 줄다리기에 참가해서 괜히 힘을 주다가 허리가 한번 삐끗!! 했고 ㅜ.ㅜ. 손바닥이 좀 까져서 현재 약간 곪았다 ㅜ.ㅜ. 다 이게 참가상을 받기 위해서 였는데, 참가상은 설겆이 용 수세미 3장. 역시 살림은 그냥 생기는게 아니고 이렇게 처절한 노가다로 벌어들이는 것.


 그런데 한참 줄다리기를 할때, 내 귓가에 또렷이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사람들이 힘쓰는 소리가 아니라, 그건 아이들이 자신들의 부모들에게 질러대는 응원소리였다.




 "감바레 오또오상!!( 힘내요 아빠)"




 감바레. 힘내라라는 일본말. 축구등 한일전이 벌어지면 일본관중석에서 늘상 하는 구호가 바로 이 '감바레 닛뽕'이다. 이 '감바루'(열심히 하다)라는 동사 만큼 일본을 압축해서 표현하는 말도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일본인들은 누군가를 격려할때도, '감바레'(열심히 하라)라고 하고, 또 본인도 '감바리마스'(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한다. 감사합니다 대신에 노력하겠다는게 일본인들의 대답이다. 즉 줄다리기를 할때 아이들이 질러댔던 소리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었다. 늘상 듣던 단어였는데 열심히 손바닥까지 까지며 줄다리기에서 밀리고 있던 나에게 묘한 울림으로 다가온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비록 채현이가 한 말은 아니지만, 그런 아들,딸들을 둔 부모들의 대열에 끼어 있었기 때문이리라.


  일본에선, 회사에서 만난 동료가 퇴사를 할때도 서로 주고 받는 말이 이 '감바레'다. 앞으로 잘 지내라가 아니다. '열심히 해라, 하길 바란다' 이다. 일본인들은 그런 말을 주고 받으며 서로를 격려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근성을 기른다.  




5.


 일본의 운동회는 기본적으로 어른들을 위한 것이다. 그것을 즐기는 애들도 있지만, 뙤약볕에서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훈련을 받은 아이들을 보면, 아이들이 자유분방하게 뛰어놀고 무언가를 표현하기 보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질서를 잘 따라해주는것. 그리고 일상생활속에서 보지 못한 아이들의 모습을 그런 운동회속에서 확인하고 싶은 어른들의 욕구가 만나서 만들어지는 축제라면 축제이다.


 일본의 도시락이 맛과는 별개로 모양을 내서 보기에 맛깔스럽게 하듯이,  어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한 고생 하는 아이들의 운동회는 어떤 맥락에서 일본 포장문화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리고 그 내용도 어떤 의미에서는 치밀하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어렸을때 지겹도록 행진연습을 하고, 줄을 맞추고, 햇빛아래서 춤을 연습했던 기억은 이제 딸래미의 율동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내가 운동회에 가서 느낀 것은 그런 아이들의 발랄한 움직임도 있었지만, 일본사회가 얼마나 촘촘하게 아이들을 관리하고, 조직화하는가이다. 유치원도 가지 않은 일본의 아이들은 그렇게 질서를 배우고,정해진 질서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룰을 배운다 것.


 어쩌면 일본의 조직성은 혹시 저렇게 줄맞추어 등장하는 아이들때부터 길러지는 것은 아닐까. 목까지 햇빛에 태워가며, 주린 배를 움켜쥐고(늦잠 탓에 아침밥 못먹었음 ㅜ.ㅜ) 내가 얻은 값싼 깨달음(?)이다.




 채현이가 속한 츠쿠시 반에 한한 것이지만, 끝까지 우는 아이를 붙잡고 운동회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선생님들이나, 우는 아이들을 가서 다독거려주고 달래주는 것이 아니라 운동회가 끝날때까지 지켜보기만 하는 부모들이나, 끝까지 울면서 인생의 고달픔(?)을 호소하던 아이들이나..




 "다들 수고했네 그려....."






ps. 작년 보육원 운동회때 썼던 글인데, 사진과 함께 정리해서 올립니다.


     벌써 1년전 일인데, 다시 가을 운동회가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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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당그니
일본! 이것이 다르다! l 2005.09.01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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