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그니의 일본표류기


0. 전 이야기 <- 격려주신 분들께 감사드림다.




1.


  오늘 소포를 풀었다.








▲ 테마동화라 해서 과학,수학이야기도 있다.


 사실 소포도 아니다. 책이 잔뜩 든 무거운 짐이다.


   처가 처제들을 동원해서 산 한국 전래동화나 과학동화들이다. 박스로 두개나 된다.


   지난주 이사할 결심을 하고 가계약을 하던날 서울에서 도착했던 것이다.


   만 3살난 아이는 당연히 아직 한글을 깨치지 못했지만 잠자기 전에 꼭 한번씩은 처가 아이에게 동화를 들려준다. 우리집에도 제법 한글 동화책이 있었지만 이번에 온 시리즈를 보태면 더 이상 초등학교 들어갈때까지 살 필요가 없을 만큼 많은 책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이 짐은 이사가 끝난 4월초에나 풀려고 했었다.




2.


 어제 토요일,


 이사를 하기로 한 곳의 가계약을 취소했다.


 이사철에 이사를 하면 이사비용이 비수기에 비해 2배나 뛰고, 또 쫒기는 마음에 이사를 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일이 너무 많아서 움직이기 힘들기 때문이기도 했다. 핑계지만.


 이사를 하고자 했던건, 일본생활이 거의 7년째 접어들려고 하는 이 즈음, 처가 언제까지 이런 유학생 같은 살림으로 살아야하냐고 불만을 토로했기 때문이다. 일본에 유학을 와서 정착한 이들은 누구나 그렇지만 제대로 살림 구색을 갖추고 사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일본에 완전히 자리를 잡기로 마음 먹은 사람들은 아예 집을 사서 나가고, 그 후에나 본격적인 가구를 사들이기 때문이다.




3.


 가구 이야기를 하니, 결혼전 서울에서 이래저래 혼수가 들어오던 날이 생각난다.


 아주 좁은 부억과 이상하게 넓은 화장실 그리고 조그만 방 두개에는 아내가 장모님과 열심히 고르고 고른 가구들이 정해진 날짜에 맞춰 차곡차곡 들어와 앉았다. 10킬로가 되는 세탁기는 텅빈 화장실에 떡하니 버티고 앉았고, 그나마 크게 느껴진 안방은 베이지색과 갈색이 곡선을 그려가며 분할하는 문양의 문을 가진 장농이 1/3쯤 잡아먹었지만, 새로 들여온 가구에서 나는 향이 나쁘지는 않았다. 방 양쪽에 장롱과 경대를 놓고 창가에 텔레비젼과 텔레비젼을 올려놓을 수 있는 가구를 놓으면 딱 두사람이 누울 수 있는 공간이 남았다.


 옆방에는 긴 책상과 책꽂이, 그리고 커다란 냉장고를 두었다. 그곳에서 난 딱 한달을 났다.




4.


 6개월만에 서울에 있는 전세집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건너오면서 아내의 혼수는 이곳저곳으로 해체되었다. 장롱과 세탁기는 장인어른 댁으로 부쳐졌고, 냉장고는 늘 냉동실이 좁아서 고생이라고 하시던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처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아끼고 모은 저금으로 산 혼수중 동해바다를 무사히 건넌 것은 지금도 채현이가 엄마 따라 립스틱을 바르고 노는 화장대와 책상, 그리고 29인치 텔레비젼, 그리고 두사람이 마주 앉을 있는 조그만 식탁뿐이다.


 5킬로가 채 안되는 세탁기와 유학생활중에 장만한 중간크기의 냉장고 두개. 그리고 일본오면서 받은 10년이 훨씬 더 된 100볼트 전용 전자레인지 등 살면서 되도록이면 싸게, 혹은 누군가에게 받아서 마련한 살림들이 집안 곳곳에 그간의 시간을 말해주고 있다.


 언젠가 떠날 곳이라는 생각에 비싼 것은 사지 못하고, 그렇다고 또 언제 확실히 돌아간다는 보장이 없는 생활속에 모아놓은 살림살이란 크기만 차이가 있을 뿐 유목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 듯 하다.




5.


 이곳 생활이 이제 자리를 잡자, 아내는 그래서 그런 살림살이가 싫은 것이다. 낯선곳의 여행지 같은 삶도 한해 두해지, 5년이상 지속되면 뭐랄까, 대체 우리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어디인가 둥둥 떠다니는 것은 아닌지 이런 생각마저 드는게 사실이다. 2주전에는 드디어 싼 값이라고 리싸이클 샵에서 산 쇼파마저 버렸다. 그리고 새 집을 얻어서 이제 좀 넓은 공간에서 새로운 살림을 가지고 살려고도 했다.


 가계약을 하고 나서 한주동안 곰곰히 생각해보니 문득 꼭 이사를 가야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지금 집이 계약기간이 만료되어서 꼭 떠나야되는 것도 아니고, 전철이 약간 불편하지만 매일 출근하는 나만 조금 운동삼아 걸어다니면 되는 곳이다. 처와 둘이서 밤 늦게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우리가 그곳으로 이사가면 과연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고 더 좋은 생활을 꾸릴 수 있는지 짙은 회의가 들었다.




 완물상지(玩物喪志). 있으면 없는 것보다 편리하지만, 가지면 가진 것에 뜻을 앗기며 물건은 방만 차지하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마음 속에도 자리를 틀고 앉아 창의를 잠식한다는 신영복 선생의 글귀가 생각났다.




6. 가끔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한국을 떠나올때 그동안 가지고 있던 것을 쉽게(?) 버리고 이곳으로 건너왔듯이, 이곳에서도 언젠가 아무 미련 없이 훌훌 털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 살자고. 물건이 많아지고 살림살이가 좀더 편해지고 이곳에 깊숙히 뿌리를 내리면 내릴수록 과연 이곳에서 저곳으로 쉽게 돌아갈 수 있을까. 물론 이제는 배낭하나 가볍게 둘러메고 운동화 끈 조여맨채 혼자서 훌훌 떠날 수 있는 나이는 아니다.


 그러나 가진것이 앞으로 지금보다 몇배는 더 늘어난다 하더라도 나는 언제든 어떤곳에서든 쉽게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이 도피가 아니라, 잘 된 마무리 속에 즐거운 헤어짐이 될 수 있기를....내가 지나온 길이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하기를 바란다.


 하여, 나는 아직도 처에게 보란듯이 보기 좋은 살림을 사주겠다고 이야기 하지 못한다. 단지 돈이 더 생기면 그 돈으로 우리가 보지 못한 더 많은 세계를 여행 다니는 것은 어떻겠냐고, 이야기 한다. 물론 여행은 커녕 주말마다 방구석에서 그림이나 자빠져 그리고 있는 나같은 잉간(?)이, 세계여행은 커녕 딸래미 손잡고 근처 공원에도 나갈 시간이 없는 인간이 하는 이야기가 씨알도 안먹힌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그래 미안해....


 그래도, 그런 여행을 꿈꾸는 것이 나에겐 아직 그럴싸한 쇼룸에 전시되어 있는 가구를 보러다니는 것보다 즐겁다.




7.


 오늘 저녁에 소포를 풀어서 빈 책꽂이에 가득 한국 동화책을 밀어넣었다. 아이는 즐거워했고, 아이가 볼 동화책과 과학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이 보기 좋았다.


 그리고 앞으로 당분간은 이사를 하지 않을 것이다. 아내도 미련은 버렸고, 나는 대신 올 겨울에는 친한 일본사람의 고향인 구마모토에 여행이나 가자고 꼬시는 중이다.




 다행이다.


 올 봄에도 단지 앞 도로에 핀 화려한 벚꽃을 볼 수 있어서....


 아이와 함께 저녁에 등불 아래 날리는 눈꽃을 맞으며 집 앞 산책로를 걸을 수 있겠구나.


 어제 가계약 취소 전화를 넣으며, 어쩌면 이곳을 떠나는 날은 내가 일본을 떠나는 날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봄날은 간다.....


                                                                                                    ⓒ 당그니


 








▲ 어쩌면 이 산책로 때문에 떠나지 못하고 있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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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당그니
일본생활 이모저모 l 2006.03.12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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