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그니의 일본표류기


 

                                                                                                          gold rush

전편  돼지삼형제 3 - 공습

1.
새로 부임한 사촌형은 확실히 아버지와는 달랐다.
아버지와 우리가 30년 정도 세대차가 있다면 형은 고작 12살 정도니까. (고작은 아니지).
그래도 사촌형의 이야기는 우리가 6-7년후면 대학생이 될 수 있다는 데서, 20년정도는 흘러야 결혼을 하고 애기를 낳고, 살림살이를 꾸리고 지겨운 직장생활을 해야 알 수 있는, 그런  밋밋한 세계보다는 확실히 가까웠다. 비유하자면 언제 열매를 맺을 줄 모르는 감나무 묘목을 심는 것이 아버지와 하는 대화라면, 사촌형과 하는 대화는 한겨울이지만, 한 9개월만 기다리면 따듯한 가을햇살 아래서 홍시를 딸 수도 있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형 그러니까 대학생은 평일 중에 하루종일 수업도 안갈 수 있는거야?"
"그럼. 방학도 너네들 보다 1개월은 더 길지."
"우..와 좋겠다."
"형 이 테잎은 뭐야? 왜 영어 공부해?"
"이제 영어를 잘 해야하는 시대란다"

사촌형은 대학 이야기부터 아이들이 들으면 혹 할만한 군대이야기까지, 챙겨들으면 나중에 쏘스로 써먹을만한 이야기가 제법 있었다.  삼총사의 대장인 친형이 불쌍한 두마리의 양을 데리고 '요단강 건너는 선지자' 같은 역할 대신, 엉뚱한 제안을 해서 양과 목자가 같이 불구덩이로 뛰어들게 만드는 역할을 했던 것에 비하면 큰 차이였다.  무엇보다 6-70년대를 관통해오신 아버지에게서 풍기던 사회란게 다 그런거고, 비정한 세계고, 살아남아야만 하고 권모술수에, 출세에, 이런 이야기는 그의 입에서 거의 듣지 못했다.
당시 시국이 85년이면 광주학살의 참극을 딛고 서서히 학생운동이 강력한 물리력을 확보하는 시기였고, 만약 사촌형이 그런 것과 관련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도 제법 우울한 정서를 드리웠을지도 모른다. 나이 먹고 깨달은 사실이지만 사촌형은 그런 세계에 발을 깊게 들여놓지 않았고, 오히려 영어 테이프만 주구장창 틀어놓고 아메리카 드림에 대한 새로운 꿈을 다지고 있던 중이었다.  
삼형제가 그러나 사촌형을 좋아하게 된 이유 중 결정적인 것은 이모님 덕택이기도 하다.


2.
  언젠가 이모님댁에 우리 삼형제는 엄마와 함께 특별한 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이모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 줄 몰랐다. 허름한 이모님댁에 가보니, 거기에는 놀라운 도구들이 있었다. 바로 뽑기(달고나) 도구들.
방과후 외판원들에게 속아서 선물을 받는다고 공터 한 구석에 자주 가던 시절. 한 30분 쪼그리고 앉아서 열심히 들어도 공짜 학용품은 영영 받을 수 없었던 그때, 공연히 책선전에 동원되었다는 느낌에 기분이 잡치면 그 옆 뽑기집에 들어가서 풀곤 했다.
기껏해야 100원 200원정도 쓰는게 전부였지만(50원이었던가) 잘 잘라내고 뜯어먹어서 별모양을 완성시키면, 하나를  더 먹을 수 있던 그때, 땟국물 잔뜩 낀 손가락으로 침을 살살 발라가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서 조금씩 뜯어먹지만 이내 한 가운데가 '뚝'하고 부러진다. 그러면 홧김에 설탕과 소다덩어리인 그것을 한입에 몰아넣고 발길을 돌렸지만 그 단맛은 그 어떤 음식보다 기가 막혔다.
그런데.....,이모님 댁에 그런 뽑기 도구들이 10개는 더 넘개 있었고, 이모님은 방배동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사촌형' 대학보내느라 뽑기 장사를 하신 것이었다. 우리가 갔을 때는 이미 장사를 접으신 때였지만, 그 도구만은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우리 삼형제를 위해서 갖은 모양의 뽑기를 만들어주셨다.
소다와 설탕이 연기를 내면서 녹다가 굳으면 황색 바탕에 갈색 무늬가 흐르듯 그어져 있고, 달 표면처럼 작은 구멍이 뚤려있던 뽑기과자. 어느 정도 시점에서 호떡처럼 동그랗게 핀 후 별모양의 찍기로 쾅 찍으면 '하나의 초딩용 초특급 과자'가 완성되는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생겼으니, 세상에 뭘 해먹겠냐"

뽑기 잔치가 끝나고 이모님은 이모부 대학 졸업사진을 보여주셨다. 조대 법대를 나오셨다고 하는 이모부. 앨범에는 눈을 똑바로 뜨고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한 젊은이가 보였다. 이모는 이모부가 꽉막힌 사람이라고 하셨고, 결국 그 옹고집때문에 오래 살지 못하고 한창때 세상을 뜨셨다고 한다. 이모님이 뽑기 장사로 나서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초등학교때, 나중에 택시운전사가 되면 택시를 마음대로 탈 수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뽑기장사를 하셨던 이모님댁 사촌형이 부러웠다.
'사촌형은 매일 뽑기를 먹었겠구나.'
'왜 우리 엄마는 뽑기 장사를 하시지 터미널에서 장사를 하실까'
하는 1차원적인 의문도 들었던 그날...이모부 이야기를 듣고도 홀로 2남매를 키우신 이모님의 그늘을 살피기에는 너무 어렸다. 오히려 열받은 것이 있었는데, 이모님 댁이 너무 먼 탓에 '공짜 뽑기 파티'는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는 거다. 우리가 사촌형을 좋아했던 건 그 뽑기의 달콤한 추억을 내내 잊지 못해서이기도 했다.


3.
"나는 일일이 다 간섭하지 않겠다. 그러나 정해진 룰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특히 남을 속이는 행위는 절대 용서 못한다. 공부를 할때는 하고, 놀때는 확실하게 놀아라."

형의 취임사(?)였다. 사촌형이 우리와 말이 통했다 하더라도, 엄연히 아버지의 전권을 위임받은 관리자였다. 우리집에서 생활을 하면서 생활비를 보조 받는 대신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삼형제의 성적을 올려야하는 의무도 있었고, 아니 그냥 책상에라도 좀더 앉아있게 하는 버릇을 들여줬으면 하는게 아버지의 바램이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초딩 6학년 주제에 중학생이 되어야 배울 수 있는 영어공부를 미리 시작하게 되었다. 그것도 되도 않는 영어 필기체를 암기해야 했지만, 그것 빼고는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그는 무엇보다 공정성을 강조했고, 그냥 기분 내키는대로 우리를 때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촌형이 주는 벌은 기껏해야 팔굽혀펴기 10개에서 15개 정도거나 손들고 있기 등 가벼운 얼차려 수준이었다.


그러나 원래 폭풍의 눈 속은 한없이 고요한 법이다.
폭풍의 눈은 고요하지만 영원히 한 곳에 머무를 수는 없다.
잠시 평온했던 삼형제와 사촌형의 질서는 메가톤급 폭풍이 드디어 이동을 하기 시작함으로써 깨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성적표는 우울했고 ㅋㅋ....만화영화, 코미디 프로 등 텔레비젼에 목말라했던 그 시절, 공부는 지루하다 못해 가출충동까지 불러오던 그때, 놀때는 확실히 놀았지만 공부할때도 놀고 싶었던 우리. 삼형제는 여전히 혀를 낼름거리면서 먹이를 찾는 뱀처럼 주요 텔레비젼 프로는 싸그리 외워서 부모님과 사촌형이 없는 주말저녁이면 채널을 골라가며 깔깔대고 TV시청을 하곤 했다. ..

그리고,
운명의 토요일 오후 4시.
잘 기억은 안나지만 유머일번지 재방송이었던거 같다.

심형래 아저씨가 삼형제의 같잖은 성적 고민을 화통하게 웃음으로 날려주던 그때....
뒷문의 끼이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앗. 누가 왔나보다. 각자 위치로!!!'

우리 삼형제가 텔레비젼을 끄고 안방에서 작은 방으로 가서 책을 펴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통상 10초.  그날도 평소 훈련했던 대로 아무일 없다는 듯 책상에 달라붙었다.
그런데....그 후 아무런 인기척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때쯤이면 한번쯤 의심을 했어야 했다. 아니 적어도 소년 심령술사인 장남만이라도 상황을 주도 면밀하게 관측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 삼형제는 심형래 아저씨 다음 대사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던지 온통 유머일번지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형이 한마디 한다.

"야 바람소리인가봐. 얼른 가서 보자"

우리가 각자위치에서 연필과 지우개를 집어 던지고 다시 안방으로 가서 TV를 트는데는 5초가 걸렸다.
그리고 정확히 30초후 .....

안방 문이 활짝 열렸다.

"야 너네들 다 마루로 나와. 엎드려!!!!!"

사촌형이었다.

몇개월전 아버지가 몰고 오신 것이 공습용 B29 수준이었다면, 사촌형이 몰고 온 것은 원자폭탄을 실은 폭격기였다. 잠잠했던 폭풍의 눈이 드디어 우리 곁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 5편에서 계속>

* 한주 잘 시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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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당그니
인생의 갈림길에서/길에서 만난 연인들 l 2006.07.24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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