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그니의 일본표류기



지난주 금요일, 지난번에 다니던 애니메이션 회사 사람들과 송년회를 가졌다.

그날 모인 멤버를 보면 군마, 홋카이도, 오키나와, 야마구치 등 한명 빼고 다들 애니메이션을 하기 위해 도쿄로 올라온 친구들이다. 한마디로 일본 전국에서 자란 사람들이 모였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그날 좀 특이했던 것은 참여한 멤버 중 한명이었다. 보통 술자리는 친한 사람과 갖게 마련이라, 같은 부서였다하더라도 7년동안 옆자리에 일을 했지만 거의 술을 같이 마시지 않던 친구도 참가했다.

'노마'라고 하는 친구인데, 파충류를 좋아하고 (뱀과 거북이와 동거중;;; 실은 키운다) 부모님 집인 야마구치까지 오토바이로 다녀오기도 하는 바이크 매니아다.

아무튼 노마는 내가 애니메이션회사를 입사하기 6개월전에 들어온 친구로 말투가 거칠어서 그런지 처음부터 그렇게 친하게 지내질 못했다. 그래도 몇년 같이 지내다 보니 사는 이야기도 하고 한국을 다녀올때 김도 건내주고 하면서 농담반, 진담반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술을 같이 마실 상대는 아니었다.

그 녀석하고 회사의 공식적인 행사, 이를테면 연수라든가 이런 자리가 아닌 사적인 자리에서 만나서 술을 마시게 된 것이다. 물론 회사 애니메이션 파트를 총괄하고 있는 나이 지긋한 프로듀서가 제안했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날 그에게서 조금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처음 지난번 회사에 입사하고 얼마 안되서 1박2일로 연수를 갔을 때 일이다. 한방에 4-5명 정도 같이 잘 수 있는 공간에 배속되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아직 학생이면서 아르바이트로 회사를 다니는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일본인들 사이에서 혼자만 한국인이라는 것도 꽤 부담이 되었다. 그런데 인사를 하고 난 뒤 아무도 말을 걸어주거나 같이 이야기를 하자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노마도 같은 부서인데다가 같은 방에 있었지만 똑같았다.

그때 경험은 일본인들은 '참 차갑구나'라는 첫인상을 갖게한 결정적인 계기이기도 했다.

이 이야기를 7년이 지난 금요일날 했더니 노마는 의외로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 그때? 그때 우리가 말을 안 건 것은 이유가 따로 있어. 오가와 상을 통해 김 상이 회사에 들어왔다고 하니까 다들 경계했던 거지"

오가와 상이란 (지금은 작고한) 유력정치인의 딸로 예전회사의 고문이기도 했다. 나는 정당한 면접(미리 준비한 습작만화 등)을 거쳐서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고 생각했지만 먼저 들어온 그들은 백을 통해 입사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때 오가와 상의 소개로 회사에 들어온 내가 사장이 자신들을 감시하기 위해서 이방에 심어놓은 게 아니냐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런 그들의 오해가 풀린 것은 오가와 상이 회사에 찾아왔을 때 나랑 서로 일면식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이었다.

"그 때 알았지, 아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구나!"

흔히 한국인과 일본인이 만나면 개인적인 정황이나 상황, 그리고 다양한 뒷배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상대가 일본인이니까, 아니면 한국인이니까 하고 쉽게 일반화시키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인이지만 성질 급한 사람이 있고, 한국인이지만 느긋한 사람도 분명히 존재하며, 일본인이지만 사교성이 좋고 적극적인 사람이 있는 반면, 한국인이지만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귀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어쨌거나 7년전에 처음 회사 연수를 갔을 때 가졌던 의문. 일본인들은 먼저 상대에게 말을 걸어온다거나 적극적으로 뭔가를 시도하지 않는다는 선입겹은 사건의 또다른 이면을 보고나서 약간의 오해가 있었음을 알고 풀리게 됐다.

그런 이야기를 듣자, 노마 와 이야기하기가 보다 편해졌다.

술을 마시면서 녀석은 징역과 이혼에 얽힌 부모 이야기를 더 했고, 거칠긴 하지만 자기가 진짜 초식남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녀석은 결국 세지도 못하면서 술을 먹다가 화장실에 가서 마셨던 술을 게워냈고, 새벽에는 술집쇼파에 누워버렸다.

새벽 4시 반이 되어서야 우리는 가게 문을 열고 나와, 뿔뿔히 흩어졌다.

돌아오는 길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노마가 건내준 조그만 카드봉투가 잡혔다.

"저기, 이거 새해 딸 선물이라도 사줘!"

녀석이 그날 나를 만나자마자 건네준 것이다.

녀석과 오랜기간 알고 지내면서 뭔가 받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을 근 1년만에 만나는 이날 딸을 위한 세뱃돈까지 생각하다니...

사람이란 참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그것도 오래 오래....

섣불리 재단하고 판단하기 이전에, 세상이란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돌아오늘 길 내내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29살이며서 경력 5년차인 '노마'가 애니메이션을 포기하지 말고 아주 훌륭한 작화감독이 되기를 바랐다. 그야말로 진짜 수줍어 여자에게 말한마디 못건내는 '초식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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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라가나 부터 기초문법, 현지회화까지

->당그니의 좌충우돌 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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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당그니
저패니메이션, 길을 묻다 l 2009.12.21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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